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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 김지윤 장편소설
    ME 2025. 6. 8. 02:40

    나는 어렸을 때 책을 많이 읽지 않았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책을 가까이 하셨고,  나에게도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말을 잘하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지만 어릴 적의 나는 책이 지루하게 느껴졌고 세상엔 더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했기에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21살이었다.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거나』를 시작으로, 지친 삶에 위로가 되는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을 추천받아 읽게 되었지만, 두 책 모두 끝까지 읽지는 못했다.
    그러던 와중 유튜브 ‘쑥쑥’이라는 채널에서 양세찬 님이 청계천에서 시민들과 인터뷰하며 책을 추천받는 영상을 보게 되었고, 그 책을 구입해 제작진과 독서토론회를 펼치는 영상까지 본 후에 나도 그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책은 생각보다 두꺼웠고, 나는 소설책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시작이 어려웠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책은 술술 읽혔고, 다음 내용이 궁금해진 적은 처음이었다. 이동 중인 지하철에서도 계속 읽었고 집에서 국을 끓이는 동안에도 책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출처: yes24

    연남동의 빙굴빙굴 빨래방에는 빨래를 하러 온 사람들이 고민을 적어놓은 연두색 다이어리가 있다. 이 다이어리에는 누군가의 고민이 적혀 있기도 하고, 그에 대한 위로나 조언이 다른 사람의 손글씨로 덧붙여지기도 한다.

    이야기는 장 영감이라는 할아버지와 진돌이라는 진돗개가 미라라는 인물의 고민을 들어주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마다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해 연두색 다이어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등장인물들은 처음엔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모두 연결되어 있다. 마지막 장에서는 장 할아버지와 그의 아들 사이의 갈등과 오랜 고민이 그려지며 책은 마무리된다. 이 책은 육아, 사랑, 가족 문제, 보이스피싱 등 일상적인 소재를 활용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는 점에서 친근하게 책에 접근하고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장. 토마토의 화분을 두드려 보세요

    장 영감의 아들은 유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장 영감에게 집을 개조해 세를 놓자고 하지만 장 영감은 과거 아내와의 추억이 담긴 집을 쉽게 내줄 수 없어 완강히 반대한다. 장 영감은 우연히 빙굴빙굴 빨래방을 발견하고 연두색 다이어리에 있는 미라의 고민을 보게 되면서 미라 가족과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2장. 한여름의 연애

    드라마 작가를 꿈꾸는 보조작가 여름과 버스킹하는 하준의 이야기이다. 여름은 공모전마다 당선에 떨어지고 하준은 버스킹을 봐주는 관객이 없어 각자의 삶에 지쳐있을 때 연두색 다이어리를 통해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3장. 우산

    미대생인 연우는 남자친구가 단톡방에서 둘만의 사적인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을 보고 헤어지게 된다. 연우는 몰래 핸드폰을 본 것에 자신의 잘못을 느끼고 휴학을 하였다.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는 자신의 이야기를 연두색 다이어리에 적게 되었고, 위로의 말을 받았다. 길고양이를 우연히 만나 키우면서 상황을 극복하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4장. 분실물 보관함

    재열의 동생인 우열이 보이스피싱을 당하고 이백만원을 잃게 되자 안좋은 선택을 하게 되고 재열은 보이스피싱범을 잡기 위해 앞서 나온 등장인물들을 우연히 빨래방에서 만나게 되면서 사람들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이다. 

     

    5장. 대추 쌍화탕

    장 영감의 아들 대주는 아들을 유학보내 기러기 생활을 하던 중 아들을 부족함없이 키우기 위해 타 병원에서 대진을 하게 된다. 이는 곧 병원에 알려져 감봉되어 더욱 돈이 필요하게 되고 마침 집에 보일러가 고장나 장 영감 집에서 살게되면서 갈등이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넌 필 거야. 네 계절에. 넌 분명히 꽃이거든.
    생각보다 봄은 일찍 온다? 내가 볼 때 넌 딱 봄 그 직전이야. 근데 봄이 오기 전에 반드시 꽃샘추위는 와. 그래도 그깟 시샘하는 추위에 꺾이지 마. 오케이?

    2장은 개인적으로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장이었다. 글을 쓴지 5년 째 공모전에서 자꾸 떨어지고 여름보다 늦게 들어온 작가들이 먼저 입봉되어 나가는 것을 보고 지금까지 자신이 무얼 했나, 자신의 실력을 의심하는 부분에서 가장 깊은 공감이 되었다. 여름이 하준에게 답글로 쓴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제 별자리는 물고기자리인데 가장 밝은 별도 4등성이어서 발견하기 어려운 자리래요. 아직까지 한 번도 두 개의 물고기를 이은 모양이라는 별자리를 하늘에서 찾아본 적이 없어요. 언젠가는 볼 수 있겠죠? 그래도 별은 별이니까 언젠가 저를 알아봐 줄 거라고 믿어요." 자신을 아직 발견되지 못한 별에 빗대어 별은 별이니까 언젠가는 자신을 알아봐 줄 거라고 믿는 여름의 모습이 나의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백 년을 넘게 산 나무도 바람에 흔들립니다. 그래야 부러지지 않고 꺾이지 않고 살아남아요. 어쩌면 그게 오랜 시간 비바람을 견뎌온 나무들의 지혜일지도 모릅니다.

     

    시련과 고난이 찾아와도 지금 내가 잘하고 있고 성장해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그리고 꿋꿋이 이겨내면 결국 살아남을 수 있다고 나를 다독여주는 것 같아 울컥했다. "미루나무는 잔가지가 많고 이파리들을 많이 만들기로 유명하지요. 크기도 크고 아주 울창해서 다른 나무들을 기죽이곤 했답니다. 하지만 태풍이 한바탕 휘몰아치면 제일 먼저 쓰러지는 놈이 바로 미루나무였어요. 이 나무는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합니다. 잔뿌리들을 옆으로 옆으로 얕고 넓게 펼치는 형태죠. 반면에 우리 동네에서 유독 느리게 자라고 큰 그늘을 빨리 만들지 못했던 밤나무가 있습니다. 미루나무도 넘어갔는데 밤나무라고 괜찮을쏘냐 싶었던 사람들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어요. 밤나무는 땅속으로 깊게 깊게 무던히 뿌리를 내린 덕분에 태풍이 와도 이리저리 흔들리기만 할 뿐 그 자리에서 더 오랜 시간 마을을 지켜주었답니다." 화려함보다 꾸준함이, 눈에 띄는 성장보다 깊이 있는 뿌리가 결국 더 오래 버티고 살아남는 법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내 자식이 힘들다는 것을 부모는 안다. 자식의 뒷모습만 봐도, 구부러진 등만 봐도 무슨 걱정이 달라붙어 있는지 아는 게 부모였다.

     

    누구나 목 놓아 울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다가 필요하다. 연남동에는 하얀 거품 파도가 치는 눈물도 슬픔도 씻어 가는 작은 바다가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실제로 집 근처에 빙굴빙굴 빨래방처럼 마음을 말없이 기대어 쉴 수 있는 공간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누구나 목 놓아 울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다가 필요하다. 말없이 들어주고, 감정을 흘려보낼 수 있는 그런 바다 말이다. 공간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글이나 문장이 되었든. 그런 바다는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문득 그런 바다를 찾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드라마 속 대사들로 위로를 받아왔지, 책으로—그것도 소설로—이렇게 큰 위로를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그저 가볍게 재미있는 소설 한 편 읽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독서였지만, 이 책은 생각보다 더 깊고 단단하게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작은 문장 하나, 누군가의 고민 한 줄, 예상치 못한 인물들의 따뜻한 말들이 조용히 나를 어루만졌다. 결국 이 책은 나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어 주었고 언제든 다시 꺼내 읽고 싶어지는 마음의 뿌리 같은 존재가 되었다.

    나처럼 지친 일상 속에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 말하지 못한 마음을 누군가 대신 표현해주길 바라는 사람, 그리고 따뜻한 이야기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진심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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